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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сенин, 1895∼1925)은 1895년 10월 3일 랴잔 지방의 콘스탄티노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09년, 세르게이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스파스 클레프키 마을에 있는 교사 세미나에 갔는데 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지도교사의 조언에 따라 시작(詩作)에 몰두하기 위해 그는 1913년 3월 모스크바로 떠난다.1915년 3월 9일, 상징주의 시의 대가 알렉산드르 블로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진땀을 흘리기까지 했다. 블로크는 예세닌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등 도움을 주었으며 그를 “천부적인 재능의 농민시인”으로 불렀다. 예세닌은 자신이 블로크와 클류예프로부터 서정시풍을 배웠고, 벨리로부터는 형식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1916년 2월, 첫 시집인 『초혼제』가 출간되자, 예세닌의 명성은 순식간에 높아져 황후와 공주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황금 시계와 목걸이를 받았다. 그러나 예세닌은 혁명에 동감해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예세닌은 1919년을 자기 생애의 최고의 해로 간주했다. 그에게 서점과 출판사, 보헤미안 문학 카페인 ‘페가수스의 마구간’에 대한 감독권이 주어졌다. 이 시기 그는 여러 시인들과 함께 ‘이미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미지주의 문학 그룹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1918년 혹은 1919년에 예세닌은 공산당에 가입하고자 지원했다. 그러니 그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어떤 혹은 모든 규율에 이질적’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열정적인 사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서는 점차 소외와 고독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1921년에 그는 “흔히, 서정시인은 오래 살지 못한다”라고 적는다.1921년 11월, 예세닌은 미국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을 만났다. 그녀는 그보다 열일곱 살 연상이었다. 그들은 1922년 5월 2일 결혼했고, 5월 10일 유럽과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의 미국 생활은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그는 뉴욕을 혐오했으며 자살을 생각할 만큼 권태로웠다. 그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영감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예세닌은 덩컨과 함께 파리로 돌아갔다. 음주와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23년 8월 5일경 그들은 모스크바로 되돌아왔고 10월 말 경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났다.
예세닌은 권태와 우울증에 빠졌으며, 알코올 중독과 환각으로 고통을 받았다. 정신적 안식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그는 두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무력감을 느꼈다. 1925년, 예세닌은 장시 『페르시아 모티프』와 『안나 스네기나』를 썼던 바쿠로 갔다. 환각이 그랬던 것처럼 피해망상증도 그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11월 그는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12월 21일 그는 갑자기 병원을 떠나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페테르부르크로 떠나 호텔에 투숙해 12월 28일, 성상(聖像)이 놓인 구석의 수도관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르게이 예세닌 [Sergei Yesenin] (해외저자사전,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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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편지
세르게이 예세닌
이제
뭘 더 생각할 게 있겠는가,
이제 뭘 더 쓸 게 있겠는가?
내 눈 앞
우울한 책상 위에
놓여진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는 이렇게 쓰신다.
“될 수 있으면 말이다, 얘야,
크리스마스 때
우리한테 내려오려무나.
내게는 목도리를 하나 사주고,
아버지께는 바지를 한 벌 사다오.
집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단다.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나도 이젠 늙었고
몸도 영 좋지 않단다
........
사랑하는 내 아들아,
대체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토록 얌전하고,
그토록 순한 아이였는데.
모두들 앞을 다퉈 말하곤 했지.
저 아이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네게 품었던 우리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구나.
게다가 더 가슴 아프고
쓰라린 것은,
그나마 네가 시로 버는 돈이
꽤 많을 것이라는
허황한 생각을
네 아버지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얼마를 벌든 간에,
네가 돈을 집에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지.
네 시가 그토록 서러운 걸 보면
나도
알겠다,
시인들한텐 돈을 잘 안 주나 보다는 걸.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요즘은 온통 슬픈 일 투성이다.
암흑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말(馬)도 없단다.
네가 집에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에겐 모든 게 있을 텐데,
네 머리로
동네 읍장인들 안 됐겠느냐.
그랬더라면 더 당당하게 살았을 텐데,
아무한테도 끌려 다니지 않고,
너 역시나
필요없는 고생은 안했을 텐데,
네 처한테는
실 잣는 일이나 시키고,
너는 아들답게,
우리의 노년을 돌보지 않았겠느냐.”
................
편지를 구겨 버린 나는
우울해진다.
정말이지 내 이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나 내 모든 생각은
나중에 털어놓으련다.
답장에서
털어놓으련다...
< 답장>
내 늙은 어머니,
사시던 대로 그냥 사세요.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다 절실히 느끼고 있다구요,
하지만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이 세상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어머니는 눈꼽만큼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어머니!
눈보라 속에서 어떻게 잠이 들 수 있지요?
굴뚝에선 웅웅대는 소리가
그렇게 불평하듯 늘어지는데.
몸을 뉘려 하면,
보이는 건 침대가 아니라
좁은 관이고,
꼭 무덤에 들어가는 것만 같을 테지요.
....
내가 사랑하는
그 봄을
나는 위대한 혁명이라
부르지요!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거예요.
그 하나만을
기다리며 불러대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가증스러움이란
레닌의 태양으로도
여태 덥혀지지 않는,
우리의 이 차가운 지구 말이에요!
바로 그래서
시인의 아픈 가슴을 안고
추태를 부리기로 나선 거예요.
술 마시고 싸움질이나 하면서 말이예요.
....
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세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시라구요.
죽음이라니요?!
왜 그러세요?
내가 뭐 외양간에서 끌어내야하는
소는 아니잖아요,
말이나
당나귀도 아니구 말이에요.
때가 오면,
지구에
불을 지펴야 할 때가 오면,
내 발로 나가겠어요,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에
목도리를 사드리지요,
아버지께는
말씀하신 바지도 사드리구요.
...............................................................................................................................................
출생일시 | 1895. 10. 3(구력 9. 21), 러시아 랴잔 콘스탄티노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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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시 | 1925. 12. 27,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
국적 | 러시아 |
스스로 '목조 러시아의 마지막 시인'이라 불렀다.
독실하고 소박한 농촌 가수이자 동시에 난폭하고 불경한 노출증 환자로서의 이중적 이미지는 혁명 시대의 급변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그의 비극적 운명을 반영해준다.
복고신앙파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7세에 모스크바로 떠났고 얼마 뒤 다시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이들 도시에서 알렉산드르 블로크와 농민 시인 니콜라이 클류예프, 그리고 혁명적 정치가들과 교분을 맺었다. 1916년에 출판한 첫번째 시집 〈초혼제 Radunitsa〉는 특이하게도 종교축일에서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어린시절의 '목조 러시아', 즉 성상화에 그려진 성인들이 축복하는 세계, 황새가 굴뚝에 둥지를 틀며 자작나무 위의 하늘이 연청색 스카프와도 같은 세계를 교회 서적의 이미지로 예찬한다. 그는 2번째 시집 〈내세의 땅 Inoniya〉(1918)에서 꿈꾸었던 농민들의 천년왕국을 가져다 줄 사회적·정신적 변환으로써 혁명을 환영했다. '내세의 땅'에 대한 그의 장미빛 유토피아적 시각은 강철과 석재로 이루어진 추악한 세계(산업화된 도시)에 맞서 '목조 물건들'을 방어한다는 단순한 에토스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1920~21년에 그는 예카테리나 2세 때 농민 봉기를 주도했던 18세기의 반역자 푸가초프를 찬양하는 장편 운문 희곡 〈푸가초프 Pugachyov〉를 집필했다. 1919년에는 러시아 이마지니즘(영미문학의 이미지즘과는 관련이 없음) 선언문에 서명해 곧 이 문학운동의 지도적 대변자가 되었다. 또한 모스크바의 문학 카페에 자주 드나들면서 시를 낭송하고 엄청나게 술을 마시곤 했다. 지나이다 라이흐(뒤에 배우이자 연출가인 프세볼로트 메예르홀트의 부인이 됨)와의 결혼이 이혼으로 끝난 뒤 1922년 미국인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과 재혼해 아내의 순회공연에 동행했다.
여행 도중 그는 광폭한 술주정으로 유럽의 최고급 호텔 객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들 부부는 미국을 방문했는데 이들의 말다툼과 공공연한 소란은 그때그때 전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예세닌은 덩컨과 헤어진 후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한동안 의식적으로 냉소적이며 오만불손한 선술집 시들을 창작해 〈깡패의 고백 Ispoved khuligana〉(1921)·〈선술집의 모스크바 Moskva kabatskaya〉(1924) 등 2권의 시집으로 펴냈다.
그의 시에는 당시 그를 지배하던 자학심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톨스토이의 손녀와 재혼했으나 폭음과 마약을 계속했다. 1924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자신은 마르크스를 5페이지도 채 읽지 못한 반면, 마을의 농부들은 소비에트의 구호를 인용하는 수준임을 깨달았고 민중의 시인으로서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자책감에 시달리며 세태에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황량하고 창백한 달빛 Neuyutnaya zhidkaya lunnost〉(1925)이란 시에서 러시아가 곧 얻게 될 힘의 비밀로써 돌과 강철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또다른 시 〈엄숙한 10월은 나를 기만했다〉에서는 솔직하게 볼셰비키 러시아에서 소외당한 자신의 느낌을 털어놓았다. 마지막 주요작품인 고백체 시 〈검은 인간 Cherny chelovek〉은 실패한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혹평이라 할 수 있다. 1925년 신경쇠약으로 잠시 병원신세를 진 뒤, 자신의 피로 마지막 시 몇 줄을 남기고 레닌그라드의 호텔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다작의, 그러나 다소 변덕스러운 작가인 예세닌은 노래에 대한 진정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의 예리하고 짧은 서정시들은 놀라운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예세닌주의'가 젊은 세대의 헌신적인 시민의식에 퇴폐적 효과를 미칠까 두려워한 공산주의 비평가들과 당 지도자들로부터 눈총을 받아 오랫동안 냉대를 받았으나 그의 시집이 1956~60년에 판을 거듭해 계속적인 인기를 증명해주었다. 예세닌 전집이 1966 - 1968년에 출판되었다.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은 주로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을 애수에 띤 감정으로 아름답게 노래한 20세기 초 러시아의 서정시인이다
그는 콘스탄티노보라는 마을의 농사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가 도시로 이주하는 통에 어린 시절 신앙심이 아주 깊은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9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재능을 인정한 선생의 권유로 모스크바에 가서 인쇄소에서 일 하면서 써서 발표한 시로 문학의 신동으로 알려졌다. 불과 15세 나이에 쓴 ‘주홍색 여명(1910)’이란 시에서 이미 뛰어난 시인 적인 재질을 보인다.
“주홍색 여명이 호수 위를 비친다/ 소나무 숲에서는 큰 뇌조의 울음소리가 울려 나온다.
꾀꼬리의 울음도 어딘가 있구나 허공 속에 숨어서/ 그러나 나만은 울 수 없지- 이 소리는 내 영혼의 불빛이다.
나는 네가 저녁이 되면 길가에서 나타날 것을 안다/ 우리는 건초 가리 밑에 있는 신선한 짚단 위에 앉을 것이다.
나는 취할 때까지 네게 키스를 퍼부을 것이야. 나는 너를 꽃 마냥 마구 구겨놓겠지/ 이렇게 도취된 행복감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의 끊임없이 애무하는 손길로 인해 네가 입었던 비단 자락을 벗어 던지겠지/ 그러면 나는 너를 품에 안고 아침이 올 때까지 숲 속으로 가리라.
큰 뇌조의 울음이 울리게 하자/ 주홍색 여명에는 달콤한 멜랑콜리가 조금 있구나”
이 시에서 보듯 그는 성적으로도 무척 조숙해서 18세에 인쇄소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사귄 안나라는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 유리를 얻었다. 유리는 스탈린 숙청시기에 체포되어 1937년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는 농사꾼의 자식이었지만 푸른 눈동자에 금발을 한 귀공자같이 생긴 미남이었다. 게다가 부드러운 음성과 낭만적인 성격으로 해서 짧은 나이에 5번이나 결혼했고 많은 염문도 뿌렸다.
18세에 쓴 시 ‘자작나무(1915)’에도 자연을 배경으로 한 서정성이 짙게 배어있다.
“자작나무/ 내 창 밑에서/ 은과 같은/ 눈에 씌워 있네.
굵은 가지들에는/ 눈이 뿌려져서/ 순백의 눈으로/장식하고 있네.
저기 자작나무가 서 있네/ 잠든 것 같은 적막 속에/ 눈송이가 밝게 번쩍이고 있네/ 황금색 태양 밑에서
그리고 석양이 천천히/ 한바퀴를 돌면/ 나뭇가지는 장식하고 있네/ 새로운 은색 옷을 입고”
그의 초기 시는 러시아 전설에서 자주 영감을 받았다. 시인은 1916년 첫 시집 ‘라두닛차(‘죽은 자를 위한 의식’ 또는 ‘모든 성인의 날’로 번역됨)’를 발표했다. 이 시집에서 그는 전통적인 시골 생활, 민속 문화, 어린 시절의 아직 개발되지 않은 러시아 풍물, 그리고 자연에 대한 범신론적 믿음을 시로 표현했다. 그가 그린 러시아의 시골은 슬픔이 깃든 낭만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러시아 농민들이 지녔던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의 보호자가 되리라는 소박한 믿음도 보인다.
러시아 혁명의 과격파인 트로츠키는 예세닌의 시에서 중세기 냄새가 난다면서 과거 지향적인 취향을 비난했다. 그러나 러시아 작가이며 언론이었던 일리야 에렌부르그는 “막심 고르키 같은 위대한 시인은 예세닌이 그 앞에서 새로 지은 시를 낭독하면 깊게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예세닌의 자살
이사도라 덩컨과 지낸 짧은 기간의 악몽을 떨쳐버리려는 듯 아직도 젊은 시인 예세닌은 모스크바에 돌아오자 미모의 한 여배우와 결혼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갈리나란 자기의 여비서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갈리나는 예세닌이 죽은 다음 해 첫 번 기일에 그의 무덤 앞에서 자살했다.
예세닌은 점점 무절제한 상태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여류시인 나데즈다 볼핀을 임신시켰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알렉산드르 볼핀-예세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생전에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알렉산드르는 나중에 자신도 유명한 시인이 되어 1960년대 안드레이 사카로프를 중심으로 했던 공산 독재 반항 운동의 주도자가 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이주한 안드레이는 유명한 수학자로 활동했다.
1925년 예세닌은 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손녀 소피아 톨스토야를 만나 다섯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그를 도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심신이 완전히 황폐되어 계속 술을 마시고 심지어 코카인까지 손에 대었다.
그 무렵 예세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마야코브스키 시인은 “나는 그를 아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돈 다발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같이 술을 마시자고 강요하는 것을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우울한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동료들에게 예세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말머리를 꺼냈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를 도울 방법이 전혀 없었다”라고 적었다. 결국 예세닌은 정신병원에 한 달간 입원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병원에서 퇴원하자 부인을 모스크바에 남겨놓고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가서 한 호텔에 투숙했다. 그는 자살하기 전에 붉은 글씨로 시를 쓰려 했지만 호텔 방에 비치된 붉은 잉크는 말라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팔목을 잘라 피를 내어 아직 식지 않은 그 피로 시를 썼다.
이 시를 봉한 다음 친구인 시인 에를리크에게 주면서 자기 앞에서 읽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12월28일 방 천장에 있는 난방용 파이프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30세였다. 죽고 난 다음 에를리크가 펴 본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피로 쓴 유서 시였던 것이다.
“안녕히, 내 친구여, 안녕히/내 사랑, 당신은 내 마음 속에 있네/ 이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헤어짐이야/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해요.
안녕히, 내 친구여, 악수도 없이 아무 말 없이/ 우리 이마에 슬픈 주름을 남기지 말자/ 이 세상에서 죽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 물론 인생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니니까”
스탈린과 후르시체프 시절 예세닌 작품은 모두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를 암송했으며 전장에 나간 많은 병사들의 손에는 그의 낡은 시집이 쥐여 있었다.
1960년대에 복권이 되어 그의 시집은 다시 출판되면서 빛을 보게 됐다. 그의 서정이 넘친 시들은 한국에서는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후에 월북한 시인 오장환에 의해 처음으로 ‘예세닌 시집’으로 소개되었다.
정유석(정신과 전문의)
【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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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세닌과 이사도라 던컨
<이사도라 던컨>
당신은 소위 말하는
저 세상으로 가 버렸소
공허감
별들과 부딪히며 하늘을 날고 있구려
선불도 없고
술집도 없이 이제 맨정신이겠구려
아니 예세닌
이는 조롱하는 말이 아니오
내 목구멍에서 치미는 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주먹 만한 슬픔의 덩어리요
<중략>
러시아 혁명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은 세기의 사랑이라고 불린 이사도라 던컨과
17살의 나이차가 난다
창작무용을 하던 이사도라는 미국에서 독일로 다시 러시아로 이주하는데
두번의 파경과 두 아이를 잃은 이사도라는 43세 (1922년) 에세닌과 결혼한다
그러나 2년만에 예세닌의 알콜중독과 폭력 신경증으로 두 사람은 결별하고
예세닌은 호텔에서 혈관을 끊고 붉은 피로 '잘 있어라 벗이여' 시를 남긴채 목을 매 30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로부터 2년후 이사도라는 스포츠카에 머풀러가 끼어 목졸려 숨지고
예세닌의 장례식에서 시를 낭송하던 마야코프스키는 5년 뒤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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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흩뿌린 단풍나무
낙엽을 흩뿌린 단풍나무여,
얼어붙은 단풍나무여
어째서 하얀 눈보라 속에 몸을 굽히고 서 있나요
아니면 무엇을 보았나요
아니면 무슨 소리를 들었나요
시골저편으로 산보라도 나가는 것 같아요
마치 술에 취한 문지기처럼 길가에 서서
눈 더미에 빠져 다리가 얼어붙은 거 같아요
아, 요즘 웬일인지 나약해진 나는
술잔치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갯버들을 만나고 소나무를 바라보고
눈보라 속에서 그들에게 여름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나는 마치 한 그루의 단풍나무 같아요
낙엽을 흩뿌린 단풍잎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초록빛으로 남으려는
겸손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바보가 되어
마치 타인의 아내인 듯 자작나무를 껴안고 있어요
/세르게이 예세닌
러시아의 농민시인인 세르게이 예세닌은 1895년에 출생하여 30세의 나이인 1925년
12월 28일 셍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예
세닌은 1916년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민중, 역사에 바탕한 섬세한 서정시와 서사
시를 발표한 러시아 혁명기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현대 무용의 개척자인 이사도라 던컨이 1922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17세 연상인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 이사도라의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예세
닌은 신경쇠약, 알콜중독과 간질병으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1925년에 자신
의 피로 마지막 시인 잘있거라 벗이여를 남기고 3년전 던컨과 신혼을 즐겼던 셍트페
테르부르크의 앙글르테르 호텔에서 자살함으로써 광기어린 시인과 천재적인 무용가
의 결혼은 이렇게 마감한다.
예세닌이 죽은지 2년후 이사도라도 파리에서 스포츠카를 시승하다 스카프가 바퀴에
끼어 순간적으로 목이 졸려 비극적으로 사망하게 된다.
잘있거라 벗이여
잘있거라 나의 벗이여, 잘있거라.
사랑스런 나의 벗이여, 너는 나의 가슴속에 있다.
운명적인 이별은 내일의 만남을 약속한다.
잘 있거라, 나의 벗이여,
손도 못잡고 말없이 이별하지만
한탄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라. 눈쌀을 찌프리고-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산다는 것도 물론 새로울 게 없다.
[출처] 세르게이 예세닌 - 블라디미스 마야코프스키|작성자 단혜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예세닌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마음은 생기 넘치는 은방울꽃들로 가득차 있다.
저녁이 나의 길 위에서
푸른 촛불처럼 별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무성한 숲 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바람인지 수탉인지?
어쩌면 들판 위에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 것이리라.
아름답다 너, 오 ! 흰 설원이여!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오! 숲의 울창한 아련함이여!
오, 눈 덮인 밭의 활기참이여!
못 견디게 두 손을 모으고 싶다.
버드나무의 허벅지 위에서.
* 세르게이 알랙산드로비치 예세닌 : 제정 러시아의 詩人. (1895 ~ 1925년 ). 소박한 형식으로
러시아의 농촌의 자연을 서정적으로 읊었으며 대표적 작품에는 시집 『주정쟁이의 모스크바 』가
있다. ㅡㅡㅡㅡㅡ 예세닌은 스스로를 러시아 ' 최후의 농민시인 '이라고 불렀다. 혁명과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러시아의 풍요로운 자연과 진솔한 농민정서를 그만큼 잘 표현한 시인은 없었다.
자작나무 숲과 황금빛 노을, 푸른 밤과 백색의 설원(雪原), 기도하는 어머니와 버려진 황무지 ....
작가 고리키는 그에 대해 '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애당초 詩를 위해 창조된 유기체 '라고 평하면서
" 끝없는 들판의 비애(悲哀)를 표현하고 , 지구 상에 살아 있는 만물에 대한 사랑과,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베풀어야 할 연민의 정을 표현하는 시인" 이라며 경탄한 바 있다.
1921년 가을, 모스크바의 한 파티장, 지친 모습으로 늦게 도착한 이사도라 덩컨이 안락의자에 앉아
한 청년에게 손짓했다. 한 손으로 청년의 곱슬머리를 만지며 서투른 러시아어로 말했다. " 머리가
황금색이야! " 청년의 입술에 키스를 한후 "천사로군! " 다시 키스를 한 후 " 악마 같으니 !" 아기천사
를 닮은 그러나 후일 악마를 닮게되는, 그 청년이 바로 ' 제2의 푸시킨 ' 이라 불리며 랭보와 비교되
었던 천재시인 예세닌이었다. 자신의 종교가 무용이라고 말하던 마흔 넷의 미국 여자 무용수와 ,
자신의 종교가 詩라고 믿엇던 스믈일곱의 러시아 청년과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사랑은 덩컨과 예세닌이라는 ' 두 시대, 두 인생관, 두 세계의 충돌' 이었다. 1923년까지 그들은 사랑
했고 결혼했고 여행했고 싸웠고 불행했고 드디어 헤어졌다.
첫눈 속을 걷노라면 ' 은방울 꽃들' 이 가득 찬 마음일 것이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 푸른 촛불 '처럼
' 별 '들이 하나 둘씩 돋아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첫눈, 저녁, 길, 은방울꽃, 촛불, 별 들이
직조해 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서정시의 교본과도 같다. 어둠과 빛, 바람과 수탉등 모든 것들의
경계가 지워진 눈 쌓인 들판을, 詩人은 "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다" 라고 표현한다.
그러고는 이 환상적인 풍경에 뜨거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첫눈을 몰고 온 아름다운 추위가 시인의
피를 덥히고 , 피가 뜨거워진 시인은 이제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안아주고 싶어 한다.
은빛 첫눈과 ,피가 뜨거운 시인의 가슴과 , 은빛 자작나무가 서로 교감하고 상응하는 이 구절은 단연
백미(白眉)다. ( 정끝별 시인의 작품해설에서 : 민음사간, 《세계의 명시 》에서 발췌함 ).
어머니의 편지
-예세닌-
이제
뭘 더 생각할 게 있겠는가,
이제 뭘 더 쓸 게 있겠는가?
내 눈 앞
우울한 책상 위에
놓여진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는 이렇게 쓰신다.
"될 수 있으면 말이다, 얘야
크리스마스 때
우리한테 내려오려무나,
내게는 목도리를 하나 사주고,
아버지께는 바지를 한벌 사다오.
집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단다.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속상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 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나도 이젠 늙었고
몸도 영 좋지 않단다.
...........
사랑하는 내 아들아,
대체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토록 얌전하고,
그토록 순한 아이였는데.
모두들 앞을 다퉈 말하곤 했지.
저 아이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네게 품었던 우리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구나.
게다가 더 가슴 아프고
쓰라린 것은,
그나마 네가 시로 버는 돈이
꽤 많을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네 아버지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얼마를 벌든 간에,
네가 돈을 집에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지.
네 시가 그토록 서러운 걸 보면
나도 알겠다.
시인들한텐 돈을 잘 안 주나 보다는 걸.
요즘은 온통 슬픈 일 투성이다.
암흑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네가 집에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에겐 모든 게 있을 텐데,
네 머리로
동네 읍장인들 안 됐겠느냐.
그랬더라면 더 당당하게 살았을 텐데,
아무한테도 끌려 다니지 않고,
너 역시나
필요없는 고생은 안했을 텐데,
편지를 구겨 버린 나는 우울해진다.
정말이지 내 이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나 내 모든 생각은
나중에 털어놓으련다.
예세닌가 어머니께 한 답장시:ㅡ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
나의 늙은 어머니, 아직 살아계세요?
저도 살아서 이렇게 인사 올립니다.
당신 오두막에 저 저녁의
황혼의 찬란한 빛이 내리고 있겠죠
숨기셔도 쓰신 편지에서 알수있어요
저를 생각하면 금새 슬퍼지시는 것
그리고 매일 슈슌을 입은 채로
길가에 나가 저를 기다리는 것도요.
저녁 땅거미가 지면
주막의 싸움에서 누군가에게
칼에 가슴을 찔리지는 않는지 걱정하시죠
아니에요, 사랑하는 어머니, 심려마세요
그건 단지 미치도록 아플뿐이죠
아무리 깊이 취하더라도,
당신께 죽는 모습을 보이진 않겠어요.
저는 여전히 그렇게 마음이 여려집니다
그리고 이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것을 꿈꾸죠
우리집 마당에 봄이와
나뭇가지가 기지개 켤 때 돌아갈 거에요
8년 전처럼 저를 그렇게 새벽에
깨우지만 말아주세요.
걱정에 잠에서 문득 깨지 마세요,
일어나지 않은 것에 놀라지 마세요.
기도하라고 하지마세요 기도는 필요없어요
다 큰 이에게 신의 보답은 더이상 없죠
당신만이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고 안식처니까요
당신만이 제게 찬란한 빛입니다.
그렇게 당신 염려를 잊으세요.
바람부는 길가에 낡은 슈슌을 입고
그렇게 서 계시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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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세닌 시선[ Стихотворения С. А. Есенин ]
세르게이 예세닌은 짧고도 질풍노도 같은 인생을 살았으며 그의 삶은 곧 전설과 신화가 되었다. 1915년, 페테르부르크에서 혜성과 같이 문학계에 데뷔한 후, 1925년에 한 호텔 방에서 자살하기까지 예세닌은 급속한 성공 속에서 여러 개의 문학적 “가면들”1)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소비에트 러시아의 서정 시인이고자 하는 사람이었고(1924년 중반에서 1925년 3월까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의 슬픈 예고자이기도 했다(1925). “자기 집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조국, 고향의 유행가조차 전혀 남지 않은 조국, 데미얀 베드니의 작품으로 대체된 조국에 대한 시에서 그는 갑자기 자신이 ‘불필요하다’는 느낌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이미 ‘존재하지 않음’보다 더 두려운 느낌이었을 것이다.”
“시들어버린 인간”, “흘러간 인생”이라는 모티브는 예세닌의 철학 서정시에서 잘 표현되었다. 일련의 비극적인 과정들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감지를 통해 예세닌은 비극주의의 날카로움을 제거하고, 혁명 후 현실과 겪는 갈등을 극복하고, 자신의 “불필요함”을 감내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의 후기 비가(悲歌)의 서정적 자아는 되돌릴 수 없는 젊음과 다가온 죽음을 푸시킨적으로 고요히 맞아들이는 경향이 보여준다. 시인은 지상의 삶에서 자신이 말년에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안식의 나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한 철학적 관계를 정립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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